맨위로가기

아라키 무라시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라키 무라시게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이케다 가문을 섬기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었다. 그는 1573년 이바라키 성주가 되었으며, 시라이가와라 전투 승리 등 군사적 공을 세웠다. 1574년 이타미 성을 함락하고 셋쓰 일국을 다스렸으나, 1578년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 모반 실패 후, 다인으로 변신하여 사카이에서 활동하며 센노 리큐의 제자가 되었다. 무라시게의 반역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며, 여러 설이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86년 사망 - 오타비오 파르네세
    오타비오 파르네세는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국의 공작으로서, 파르네세 가문의 권력 유지 및 확장, 도시 계획, 경제 개혁, 문화 예술 후원에 기여했으며, 공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 1586년 사망 - 깃카와 모토하루
    깃카와 모토하루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으로, 깃카와 가문을 이어 모리 가문의 세력 확장에 기여한 무장이다.
  • 다인 - 아시카가 요시마사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8대 쇼군으로, 오닌의 난 발발의 원인 제공자 중 하나로 지목되지만 히가시야마 문화를 꽃피우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 다인 - 마사키 나오히코
    마사키 나오히코는 일본의 교육자이자 미술 행정가로, 도쿄미술학교 교장 재임 동안 문부성 미술전람회 개최와 박람회 및 미술관 건설 등 미술 행정에 기여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졌다.
아라키 무라시게
기본 정보
"太平記英雄伝 廿七 荒儀摂津守村重 가와쿠니 요시쿠니 필 가에이 원년-2년(1848년-1849년)경"
본명아라키 무라시게 (荒木 村重)
출생1535년
사망1586년 6월 20일
이명주니로 (十二郎, 유년기 이름)
무라시게 (村重)
도훈 (道薫, 호)
야스케 (弥介), 야스케 (弥助) (통칭)
이케다 시나노노카미 무라시게 (池田信濃守村重)
계명추에이소쿤 거사 (秋英宗薫居士, 고금차인계보)
심에이도쿤 선조문 (心英道薫禅定門, 황촌사 위패)
묘소오사카부사카이시사카이구난슈지
오사카부사카이시사카이구묘호지 (구 난슈지 사지)
효고현이타미시황촌사
관위시나노노카미
셋쓰노카미
가문후지와라 씨히데사토 류아라키 씨
기타 사항리큐 10철 중 한 명
가계
아버지아라키 요시무라 (荒木 義村)
어머니나카가와 사도노카미 여동생 (中川佐渡守妹)
형제자매아라키 무라시게
노무라 단고노카미 부인 (野村丹後守室)
스이타 무라 씨 (吹田村氏)
배우자이케다 나가마사 딸
기타가와라 미카와노카미 모 (北河原三河守某) 딸
다시
자녀무라쓰구
무라모토
이와사 마타베에 외
정치 경력
소속[[파일:Japanese Crest Mokkou.svg|15px]]셋쓰 이케다 씨
[[파일:Mon-Oda.png|15px]]오다 씨
주군이케다 가쓰마사
이케다 도모마사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직책이바라키 성 성주 (1573년 ~ 1574년)
이타미 성 성주 (1574년 ~ 1579년)
계급다이묘
주요 전투
참전시라이가와라 전투 (1571년)
이타미 성 공방전 (1574년)
이시야마 혼간지 공방전 (1576년)
미키 전투 (1578년)
이타미 성 공방전 (1579년)
하나쿠마 성 공방전 (1580년)

2. 생애

아라키 무라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1573년 이바라키 성의 다이묘(봉건 영주)가 되어 일본 전역에서 군사적 공적을 쌓았다.[1]

1571년, 무라시게는 시라이가와라 전투에서 와다 고레마사를 죽였다.[2] 1574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와 함께 아리오카 성(이타미 성)을 함락시켰고, 노부나가는 이타미 성을 무라시게에게 주었다. 1576년에는 이시야마 홍간지 공성전에서 노부나가 군대의 일부를 지휘했다.

1578년 미키 공성전 중, 무라시게는 노부나가의 적이었던 모리 씨족에 동조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무라시게는 이타미 성(효고현)으로 후퇴하여 오다 군의 1년간의 공성전을 견뎌냈지만, 1579년 성이 함락되었다.

이타미 공성전 (1579년)에서 탈출한[3] 무라시게는 센노 리큐의 다도 사범으로 남은 생애를 보냈다. 그는 도훈(道薫)이라는 다명을 사용하며 다인으로 봉직했다.[4] 리큐는 무라시게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고금 다인 계보’(古今茶人系譜)에서 무라시게는 리큐의 칠성 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5]

1580년, 이케다 쓰네오키는 하나쿠마 공성전에서 무라시게를 물리쳤다. 결국 무라시게는 탈출하여 모리 씨족에게 투항했고, 나중에 쓰네오키는 무라시게의 영지를 받았다.

아라키 무라시게가 천선(天扇)](tessen)을 사용하여 목숨을 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역 혐의를 받은 아라키는 주군 오다 노부나가 앞에 불려갔다. 그는 방에 들어서기 전 문턱에 깊이 머리를 숙였는데, 노부나가가 fusuma(장지문)](fusuma) 미닫이 문을 닫아 그의 목을 부러뜨리려는 계획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아라키는 부채를 문의 홈에 끼워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어머니의 성으로 자랐으며, 화가 이와사 마타베이(岩佐又兵衛)였다.

2. 1. 이케다 가신 시대

아라키 무라시게는 이케다 가쓰마사의 가신으로 섬겼고, 이케다 나가마사의 딸과 결혼하여 그 일족이 되었다.[9] 그러나 미요시 삼인중의 책략에 가담하여 이케다 도모마사와 함께 미요시씨에 투항, 가쓰마사를 축출하고 이케다씨를 장악했다.

겐키 2년(1571년) 8월 28일 시라이가와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미요시씨에서 오다가로 옮기는 것을 허락받았다.[2]

덴쇼 원년(1573년), 이바라키 성주가 되었고, 같은 해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공격할 때 노부나가를 맞이하여 와카에 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한편, 요시아키 측에 속했던 이케다 도모마사는 나중에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여 무라시게의 가신이 되면서, 무라시게가 주군인 이케다씨를 빼앗는 하극상을 벌였다.

2. 2. 오다 가신 시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된 무라시게는 1573년 이바라키 성의 다이묘(봉건 영주)가 되어 일본 전역에서 군사적 공적을 쌓았다.[1]

겐키 2년(1571년) 8월 28일 시라이가와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미요시씨에서 오다가로 소속을 옮겼다.

덴쇼 원년(1573년), 이바라키 성주가 되었고, 같은 해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공격할 때 와카에 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덴쇼 2년(1574년) 11월 15일, 셋쓰 국인 이타미씨가 지배하는 이타미 성을 함락하고 이타미 성주가 되어 셋쓰 일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1576년에는 10년간 이어진 이시야마 홍간지 공성전에서 노부나가 군대의 일부를 지휘했다.

덴쇼 3년(1575년), 우키타 나오이에에게 배반당한 우라가미 소케이를 지원하여 “우키타단죠”(소재지 불명)에 우라가미 소케이를 입성시켰다. 이 해 11월에는 “셋쓰노카미”를 자칭했으며, 같은 해 7월 오다가 중신들이 관직에 임명되었을 때 무라시게도 정식으로 관직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노부나가를 따라 에치젠 일향 일기 토벌, 이시야마 전투(타카야 성 전투, 덴노지 전투), 키슈 정벌 등에서 무공을 세웠다.

2. 3. 모반과 몰락

1578년 미키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요시 군에 참여했던 아라키 무라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갑자기 반기를 들었다.[10] 그 이유는 후술한다. 무라시게는 구로다 요시타카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아리오카 성(이타미 성)에서 농성하며 오다 군에 1년 동안 저항했다.[3] 그러나 측근인 나카가와 기요히데다카야마 우콘이 노부나가 측에 투항하고, 모리 씨의 원군도 오지 않아 궁지에 몰렸다.[10]

1579년 9월 2일, 무라시게는 아리오카 성을 빠져나와 니지 성으로 갔다.[10] 이는 게이겐쇼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10] 실제로 그 후에도 반년 이상 니지 성에 머물며 항전했다.[10] 아마노 타다유키는 노미 문서를 근거로, 무라시게가 백여 기와 함께 오다 측의 포위망을 뚫고 니지 성으로 향했다고 주장한다.[10]

11월 19일, 노부나가는 "니지 성과 하나쿠마 성을 열어주면 처자식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무라시게의 가신들과 맺었다. 그러나 무라시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신들은 처자식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에 노부나가는 본보기로 인질 처형을 명령했다. 12월 13일, 아리오카 성의 여인 122명이 니지 성 근처에서 살해되었고, 12월 16일에는 무라시게 일족과 중신 가족 36명이 교토에서 참수되었다.

그 후에도 노부나가는 피난 중이던 아라키 일족을 찾아 모두 죽였다. 1581년 8월 17일에는 고야 산금강봉사가 무라시게의 가신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전국에 있던 고야 산 승려 수백 명을 잡아 죽였다.

무라시게는 아들 무라쓰구와 함께 하나쿠마 성으로 옮겨 저항했으나(하나쿠마성의 전투), 결국 모리 씨에게 망명하여 오도에 은거했다고 전해진다.[11][12]

2. 4. 다인으로서의 삶

오다 노부나가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한 후, 무라시게는 사카이로 이주하여 다인으로 활동했다.[4] '도쿤'(道薫)이라는 호를 사용하며 쓰다 소케이의 다회에 참석했다.[4] 센노 리큐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5] 1586년에 사카이에서 사망했다.

3. 모반의 이유

아라키 무라시게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모반한 이유는 여러 설이 있지만,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노부나가는 무라시게를 중용했기 때문에 그의 배신에 놀라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노부나가공기`, `프로이스 일본사` 등).[1]


  •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요청: 무라시게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이시야마 혼간지와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요청을 받아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설이 있다. 당시 무라시게가 지배하던 셋쓰 국은 주고쿠 방면으로 진출하던 하시바 히데요시와 하리마, 단바 방면으로 진출하던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중요한 지점이었다. 따라서 무라시게가 모반하면 이들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기에, 요시아키와 혼간지의 의향에 따른 모반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 모리 데루모토의 조략: 무라시게가 모리 데루모토의 계략에 넘어갔다는 설도 있다.[10] 데루모토는 다지마 국에 주둔하던 고시 시게노부(이즈모 국 가무 군 고시 향의 고쿠진 영주)를 통해 무라시게를 포섭하려 했다. 또한, 데루모토가 비호하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도 막부 봉공슈인 고바야시 이에타카를 모리 씨의 부장과 함께 아리오카 성에 보내 무라시게에게 모리 씨에게 귀순하도록 설득했다. 데루모토는 무라시게가 반기를 들자 기뻐하며 이에타카에게 포상을 내렸다. 무라시게가 모리 씨에게 제출한 귀복 서약 혈판 신문(기청문)에는 "공의(요시아키)에게 충의를 다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 가신의 밀통 발각 우려: 무라시게의 가신(나카가와 기요히데로 추정)이 몰래 이시야마 혼간지에 병량을 빼돌렸고, 이것이 노부나가에게 발각될 경우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모반했다는 설이 있다.

  • 노부나가 측근과의 갈등: 노부나가의 측근 하세가와 히데카즈의 오만함에 분노했다는 설도 있다. (`당대기`) 이 책에서는 히데카즈가 무라시게에게 소변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다케나카 시게하루와 같은 일화이므로 신뢰성은 낮지만, 노부나가의 측근들과 어떤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 장래에 대한 불안: 덴쇼 원년(1573년), 무라시게가 노부나가를 오미 국 세타에서 맞이했을 때, 노부나가가 칼끝에 꽂아 내민 떡을 받아먹어야 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라는 원한 설이 있다. (후술]하는 『회본 태합기』 2편 권지6 "아라키 무라시게가 떡을 먹다" 장면을 모반의 이유와 연결한 것). 이시야마 전투에서는 선봉을 맡았고 하리마 국 사람들과도 연관이 있었지만, 혼간지 공격 지휘관이

4. 전설

오노미치시 사이고지에 무라시게가 은거했다는 전설이 있다. 『음덕태평기(陰徳太平記)』와 현지 전승에 따르면, 무라시게는 오노미치로 도망쳐 "미즈노안(水之庵)"에 은거했다고 한다.[1]

무라시게는 부채(천선)를 이용해 오다 노부나가의 암살 시도를 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역 혐의를 받은 무라시게는 노부나가 앞에 불려갔는데, 방에 들어서기 전 문턱에 깊이 머리를 숙이는 관례를 따랐다. 이때 노부나가가 경호원들에게 장지문(fusuma)을 닫아 목을 부러뜨리려는 계획을 감지한 무라시게는 부채를 문의 홈에 끼워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 이로써 노부나가의 계획이 드러나 무라시게는 목숨을 구했고,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한다.[1]

5. 후손

이와사 마타베에는 에도 시대 초기에 활약한 화가로 우키요에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오다 노부나가에 의한 처형에서 유모의 기지로 살아남은 무라시게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14]

아라키 젠베에 또한 아라키 무라시게의 아들로, 아리오카 성 함락 당시 어린 젠베에를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맡아 길렀다. 성장 후 무역(無役) 300석의 지행을 받았고, 이후 단고 오에야마의 호소카와가 고슈(高守) 성대 등을 역임했다.[15] 호소카와 가문이 히고 국 쿠마모토 52만 석의 다이슈가 된 후 경안 원년에 구마모토 번이 작성한 「경안 원년 고사이 면부장(慶安元年御侍免撫帳)」에 따르면, 아라키 젠베에의 지행은 200석이었다.[11]

오사카부 기시와다시 아라키마치에는 이타미 성 함락 당시 무라시게의 아들 이와쿠스가 유모와 함께 피난하여 요시이무라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정착하여, 아라키무라가 성립되었다는 전승이 있다.[16]

구마모토 번에는 무라시게의 아들인 아라키 무라카쓰의 아들 아라키 가쓰유키 계통이 봉직했다.

아라키류 권법은 창시자를 무라시게의 손자인 아라키 무진사이 겐 히데나와로 한다.[17]

에치고 국 도이나미 군 조바타 성주 아라키 젠타유는 아라키 무라시게의 아들이라는 전승이 있다.

6. 주요 가신

이름설명
다카야마 도모테루(高山友照)-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다카쓰키 성주, 도모테루의 아들[8]
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清秀)이바라키 성주, 다카야마 우콘의 사촌. 일설에는 무라시게의 사촌이라고도 함[8]
이케다 도모마사(池田知正)본래 무라시게의 주군이었으나, 실질적인 하극상으로 무라시게의 부하가 됨[8]
아라키 모토키요(荒木元清)시게모토(重元)의 아들(아버지는 무라시게의 삼촌・무라마사(村正)라고도 함[8]). 무라시게의 사촌으로 여겨짐. 하나쿠마 성주[8]
후키타무라 씨(아라키무라 씨)후키타 성주, 무라시게의 친동생(이복동생).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살해됨[8]
노무라 단고노카미(野村丹後守)무라시게의 처남(매제). 아리오카 성이 함락될 때 할복(참수되었다는 설도 있음)[8]
아라키 시게모토(荒木重元)아라키 일문[8]
키노시타 시게카타(木下重堅)(아라키 시게카타)후에 키노시타 성을 칭함[8]
아라키 고로에몬(荒木五郎右衛門)[8]
아라키 에치고노카미(荒木越中守)아내는 무라시게의 여동생이라고 함(『寛政重修諸家譜』)[8]
이케다 이즈미노카미(池田和泉守)[8]
오가와라 구마사(大河原具雅)[8]
시오카와 구니미쓰(塩川国満)야마시타 성 (셋쓰 국)(다다 성)주[8]
노세 요리미치(能勢頼道)마루야마 성 (셋쓰 국 노세 군)(노세 성)주[8]
가토 시게토쿠(加藤重徳)[8]
안베 진에몬(安部仁右衛門)오와다 성주[8]
와타나베 간타로(渡辺勘太郎)아리오카 성이 함락될 때 할복[8]
군 헤이타이후(郡兵大夫)[8]
군 소호(郡宗保)[8]


7. 아라키 무라시게를 소재로 한 작품

요네자와 호노부의 나오키상 수상작 흑뢰성은 1579년 이타미 공성전 당시 무라시게의 이야기를 다룬다.[6]


  • 희곡
  • * 시마 료타로, 『도깨비불』 (1975년 12월, 중앙공론사)

7. 1. 소설

요네자와 호노부의 나오키상 수상작 흑뢰성은 1579년 이타미 공성전 당시 무라시게의 이야기를 다룬다.[6]

다음은 아라키 무라시게를 다룬 소설 목록이다.

  • 상다 히데토, 『꼭두각시가 아니다』 (2016년 3월 도쿠마쇼텐, 2019년 3월 도쿠마문고)
  • 엔도 슈사쿠, 『반역(상・하)』 (고단샤문고)
  • 쿠로베 토오루, 『아라키 무라시게―목숨 아까워서』 (PHP연구소)
  • 신궁 마사하루, 『효고의 항아리―이문·혼노지의 변』 (신인물왕래사)
  • 하야마 신키, 『나 먼저, 사람 먼저』 (신인물왕래사 『멸망의 장수』 수록 → 쇼가쿠칸 문고 『멸망의 장수』 수록)
  • 가쿠 코이치로, 「바람의 무사―아라키 무라시게」 (고단샤 『화조의 난 리큐의 칠철』 수록)
  • 신자키 지로, 「도펀류전」 (신초샤 〈신초문고〉 『효고두의 반란』 수록)
  • 히사카 마사시, 「웅크리다」 (분슌문고 『장심의 꿈』 수록)
  • 키타노 다케시, 머리 (2019년 각카와문고)
  • 요네자와 호신, 『흑뢰성』 (2021년 6월, KADOKAWA)

7. 2. 영화, 드라마

참조

[1] 서적 The Ueda Sōko Tradition of Chanoyu Hiroshima Bunko 2016
[2]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1906
[3]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4] 서적 Chanoyu jinbutsu jiten : ryakuden kotoba itsuwa Sekaibunkasha 2011
[5] 서적 Chanoyu jinbutsu jiten : ryakuden kotoba itsuwa Sekaibunkasha 2011
[6] 웹사이트 『黒牢城』米澤穂信著 籠城戦が密室ミステリーに https://www.sankei.c[...] 2021-07-04
[7] 문서 (元亀元年)6月24日付池田一族等連署書状(『中之坊文書』)。
[8] 문서 『系図纂要』より。
[9] 웹사이트 寛永諸家系図伝 藤原氏 丙2 北家 https://www.digital.[...]
[10] 웹사이트 荒木村重の戦いと尼崎城 http://www.archives.[...] 2024-05-00
[11] 웹사이트 「軍師官兵衛」にも登場、荒木村重しのび茶会 : ニュース : 新おとな総研- 読売新聞 http://www.yomiuri.c[...] 2015-05-00
[12] 뉴스 2014-02-28
[13] 문서 『荒木略記』、『寛永諸家系図伝』、『陰徳太平記』。
[14] 문서 『岩佐家譜』など。近年『寛永諸家系図伝』所収の荒木家の家系図を根拠に、又兵衛は村重の末子ではなく、村次の長男で村重の孫とする説もある(畠山浩一「岩佐又兵衛伝再考 ─血縁関係の再検討を中心に」、『国華』第1364号第114編第11冊所収、2009年)。
[15] 서적 綿考輯録 出水神社
[16] 웹사이트 岸和田市:市史史料目録「荒木家文書」 http://www.city.kish[...]
[17] 웹사이트 荒木流拳法 http://www.nihonkobu[...] 日本古武道協会 2010-01-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